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기원은 1901년, 외국 선교사 25명과 한국장로 3명, 그리고 조사 6명으로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다. 이 후 1907년에는 외국회원 38명과 한국회원 40명으로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독노회)가 조직되어 실질적인 사무처리를 다루게 되었다.
총회의 모체가 된 독노회는 1911년 총회 조직을 결의했다. 준비과정을 거친 후 2012년 9월 1일, 드디어 평양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를 조직하고 언더우드로 잘 알려진 원두우(H.G.Underwood)를 총회장에 선출했다.

한일합방으로 조선(대한제국)이 일제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총회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신앙의 대상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 임에도 국가의 의식이라 합리화하며 1938년 9월 9일 열린 제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목사)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일본의 멸망과 남북 분단으로 남쪽의 12개 노회만으로 제32회 총회(총회장 배은희목사)가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1938년 제27회 총회가 가결한 신사참배는 신앙부족으로 일제의 강압에 굴북해 저지른 잘못‘이라며 회개와 ‘신사참배 결의 취소’를 결의했다.
1949년 제35회 총회(총회장 최재화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변경하고 1954년의 제39회 총회(총회장 이원영목사)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제명당한 기록을 취소하기로 가결했다.
총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총회장 양화석목사)에서 WCC 찬반 문제로 반대 입장인 합동측과 찬성파인 통합측이 분열했다. 합동총회는 1959년 승동교회당에서 속회해 WCC 영구 탈퇴와 NAE탈퇴를 결의했다.
1968년 부산초량교회에서 열린 제53회 총회(총회장 손계웅목사)는 대회제도를 실시키로 하고 5개 대회를 두기로 했다. 중부대회(경기 강원). 충청대회(충청남북도). 호남대회(전라남북도). 영남대회(경상남북도). 서부대회(무지역노회와 서울일원)
황해도와 호남이 주도해 온 교권의 주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세력이 김윤찬목사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세력과 손을 잡아 교권을 획득한 결과가 대회제였다. 이를 계기로 비주류였던 영남이 총회의 주류를 차지해 총회를 이끌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사가 영남의 이영수목사다. 1967년 열린 제52회 총회(총회장 김윤찬목사)에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총회 부서기에 당선된 이영수목사는 1980년 열린 제65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기까지 14번이나 총회 임원을 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영수로 대표된 영남의 독주는 총회를 다시 한 번 할퀴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큰 상처를 남겼다. 1979년 대구동부교회에서 열린 제64회 총회(총회장 한석지목사)에서 영남 교권의 독주에 대한 반발로 비주류가 ‘합동보수’총회를 만들었다.
분열의 결과는 참담했다. 비주류가 나간 것으로 끝나지 않고 비주류 안에서 분열이 계속되었다. 사분오열이란 용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분열의 도미노는 신학교의 난립과 어디가 정통이고 어디가 합동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교권의 독점으로 인한 폐해를 방지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호남과 황해도든 영남과 평안도든 어디든 총회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지역을 크게 나누어 매년 돌아가면서 3년마다 같은 지역 후보끼리 경쟁하게 만든 것이 현재의 총회 3구도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제어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지만 3구도는 완전한 제도가 아니다. 지역 안에서만 경쟁해야 하기에 인재풀이 좁아 신앙과 능력을 겸비한 적임자를 선출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3구도는 공평한 듯 보이지만 공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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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사-3] 총회 3구도의 문제, 해결 방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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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신문은 총회 선거제도에 대한 문제를 이번 기사를 포함해 세 차례 기획기사를 보도합니다. 독자들의 관심과 의견, 그리고 성원을 바라며... (010-9210-0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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