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충주지씨 제21세 득선 할아버지 세거지, 충청북도 증평 삽사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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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지씨 제21세 득선 할아버지 세거지, 충청북도 증평 삽사리를 찾아서

충주지씨 집성촌인 증평 삽사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지교관 어르신 이야기
기사입력 2020.03.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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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길 사무국장-안녕하십니까? 현재까지 여기에 살고 계시는데 삽사리에 대해서 소개 해 주시지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저희 부락이 제가 나서 여기서 커서 그냥 지금까지 평생을 살고 있지만은 옛날 어른들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마을이 증평에서 우러러보는 마을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가 저 너머 돌아 가면은 저수지가 하나 있어요. 동네 어른들이 왜정 때 등어리 짐을 져서 만든 거에요.

지용길 사무국장-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 안에 우리 대종산이 이렇게 양쪽으로 벌리고 있는데 거기가 대종산이고 바로 지금 나가서 이쪽으로 가면은 옛날에 선조 할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와서 혼자 저 넘어 움골이라는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지용길 사무국장-득선 할아버지가 처음 오셨을 때 이야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거기서 뭐야 피신을 한 거지. 우리나라 역사나 집성촌 전국에 사시는 고장을 가보면. 그 때 당시 고려시대는 선조어른들도 잘 지냈는데. 고려 말엽에 그만 역적으로 몰렸어. 뭐냐 너무 고지식해서.

지용길 사무국장-그러게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 하던 것을 위에 직무진이 바뀌는데 그 자리에서 같이 했으면 되는데. 아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어른들 말씀이 그러더라구.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지용길 사무국장-,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되니까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니께 나는 여기서 살고 이제는 더 이상 개입을 안겠다고 하니 그 길로 역적으로 몰렸단 말이야.

지용길 사무국장-그렇지요. 새로운 정권에서는 역적이 되는 거지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나라의 일을 반대하면은 그 때는 삼족을 멸할 때니까? 벼슬이고 뭐고 다 내버리고 목숨 살기도 바빠서 인자 전국으로 숨어 지내는 것이지.

지용길 사무국장-저도 어릴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니 밤나무 골에 나한테는 15대조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 혼자 저 산 뒷 골짜기로 가서 산거야. 그 때는 여기 증평서 들어오는데도 아무것도 없었어. 소나무만 그냥 꽉 들어 차가지고 사람만 그냥 걸어 다니고 사는 사람도 없으니까 무인지경이지. 그러니까 거기 숨어 살았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은둔생활을 한 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숨어 살다보니까 세월이 흘러가지고 이제 뭘 그렇게 있던 분이 어디로 가서 뭘 하지도 못하고 그냥 망상에 잠겨가지고.

지용길 사무국장-막막한 상황이었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니까 그 옛날에 신고 다니던 신발을 제대로 못 신고 돈 있는 사람이나 한양 가면 질긴 것을 사 신었고 짚신을 신고 다녔지. 짚세기 장사를 했다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지용길 사무국장-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혈혈단신으로 움막을 짓고 사셨는데 내가 이야기 들은 대로는 그렇게 사시는 우리 할아버지를 두서춘이라는 옛날에 지리학자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분이 저 진천서부터 두태산을 밟아서 무인 산중을 자기가 걸어서 걸어서 지리학을

지용길 사무국장-연구하려고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진천에 와서 뭐 와우영토라고 지금 그러는데. 초평 이씨네 그 마을 터를 와우영토라 그러는데 그 동네 자리를 잡아주고 이 산 중을 넘어서 오다보니께 신이 헤어져 신을 사 신어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야 사 신지. 그런데 내려오다 보니께 그 산 중에 초라하고 조그만 하천가에 움막살이 집이 하나 있었던 것이지.

지용길 사무국장-반가웠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거기를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께 우리 15세조 할아버지가 누가 오려니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람이 찾아왔어. 그래서 거기서 만나서 보니께 참 사는 게 아니지 짚신이나 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인심은 그 때 한 없이 좋았던 거지.

지용길 사무국장-잘 찾아온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저기 옥고개라는 곳을 넘어서 우리 종산 그 밑에로 길이 있었는데 거기서 송택이라는 곳으로 해서 장이 서기 때문에 장꾼이 거기로 다니고 그랬는데. 옛날에는 장꾼들이 차량이 없고 하니까 그냥 장짐 자기 팔러 다니는 것을 이고 지고 다녔으니까. 새벽만 되면은 어디서 하숙하다가 길을 많이 가야 장이 나오니까. 그렇게 걸어 다니니까.

지용길 사무국장-장에 다니는 상인들이 지나다녔군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쪽다리 뱀이라고 별명이 그랬는데 거기에 나무로 된 말뚝하나 박아 놓고 우리 할아버지가 밤새도록 신을 삼아가지고는 10켤레가 한 죽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꿰어가지고는 그 말뚝에다가 딱 걸어놓고는 그 옆에다가 엉성한 걸 신주머니 하나를 달아놓고 신 값이 얼마입니다.” 써 놓으면 가던 장사꾼들이 아 여기 신을 파는 건가 보다 해서 신을 파는가보다 해서 신고 값은 주머니에 넣고 그러니.

지용길 사무국장-서로 믿고 양심적이었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갔다 논 사람도 이제 저녁때 되면은 걸어놓고 보면 신 값이 들었으니까 돈을 꺼내도 또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지용길 사무국장-그렇게라도 살 길이 열렸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런데 옛날 공직에서 일하던 어른이 그렇게 숨어서 살다보니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가지고 공상에 잠겼던 거지. 신을 잘못삼은거야. 신을 너무 크게 삼은거야 정도에 맞게 삼아야 하는데.

지용길 사무국장-생각이 많아지니 실수를 한거군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이고 이거 그냥 짝이나 채워놔야지 잘못된 거 내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똑같이 짝을 만들어가지고서 옛날 옷 거는 것을 옛날에는 횃대라고 그러지 그 횃대 끝에다가 매달아놓고 있었는데.

지용길 사무국장-짚신 샘플이 된 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런 차에 두서춘이라는 사람이 할아버지를 만나가지고 들어가서 신발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시냐고. 그러면 내가 한 켤레 삼아주겠다고 그랬더니 아니라고 나는 사 신으려고 그런다고. 그런데 마침 신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발은 이제 편하게 가겠다고 그러는데.

지용길 사무국장-그러게요. 짚신을 삼는 분을 만났으니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할아버지가 신어보라고 해서 신어보더니 그 사람이 거인이었던 모양이야. 신어보고 하는 말이.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면서도 내 발에 맞는 신을 직접 못 사 신고 맞춰서 치수대로 만들어 주세요 해서 신었는데 공교로이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보기는 처음이라고 좋아 한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 사람은 정말 반가웠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면서 신발값을 내려고 하니까 내가 신발값을 받을 수 없다고 그냥 신으시라고 할아버지가 말 하니. 신발값을 안 받으신다니 제가 영원히 살 집 터나 하나 봐주고 간다고 하더래. 그러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정해준 곳이 여기 이 자리라는 거야. 그 때 그 할아버지 살도록 마련해준 터는 지금 절 진 터여.

지용길 사무국장-그 사람은 뭐라도 보답하고 싶었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 자리에 집을 짓고 사시면. 이 앞에 산이 대봉산이라고 해. 또 저쪽 앞의 저 산이 창고봉이라고 해. 그와 같이 재물이 셀 것이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것이라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서는 덕택에 신발 하나 잘 얻어 신고 갑니다.” 하고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갔대.

지용길 사무국장-당시에는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잔하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나가면서 유언까지 했다는 거야 그 양반이. 어르신, 대봉산이라고 뭔지는 모르지만 노적봉 저 산이 노적봉 저 산이 헐벗게 되어 표시가 나걸랑 그 때는 나무가 꽉 찼거든 저 산이 벌겋게 돼서 표시가 나면은 내 건너 옮기시오.

지용길 사무국장-무슨 예언까지 했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랬는데 그걸 15세조 할아버지가 자손들에게 얘기해 전해져 내려 왔는데 자손들이 못 알아들었어. 그래서 내가 얘기를 들어보면 그 후로 할아버지 자손이 퍼져가지고 이 동네가 한 50여 호가 되고 증평에서 최고 부자마을이 되었단 말이야. 그 양반 말한 대로.

지용길 사무국장-자손이 번성하고 여유롭게 살았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웬걸. 해방되고 나서 이제 전부 나무를 해서 때니까. 일제시대 때는 나무를 못 베어 때게 하고 지들이 산을 갖고 그랬는데 그걸 해제를 하니까. 아 우리 국민들은 어떻든 좋다고 내 맘대로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때고 하니까. 증평이 그 때는 임자도 없는 무인지경이었지

지용길 사무국장-주인이 있을지라도 다 관리가 안됐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래 우리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할아버지 말 대로만 했으면 지금까지 자손들이 잘 사는데 그만 자손들이 말 귀를 못 알아들어가지고. 그 때는 어려움 없이 잘 살았으니 고생을 몰라가지고 유언의 말씀을 옮기지 못하고 잊어버린거야.

지용길 사무국장-몇 백 년이 지났을 텐데 다 잊어버리지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들었는데도 뭐 자신들은 짱짱하고 잘 있으니까 걱정 없으리라 했겠지만 다 무산돼 가지고 증평에서 제일 못하는 마을이 되었어요. 빈촌이야 아주.

지용길 사무국장-그러니 이제 옛 할아버지들 이야기가 생각났겠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 중에 조금 재산 있어서 잘 사는 사람들은 자꾸 나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남다 보니 못 살수밖에. 열심히 일하고 살기는 했지만 삼시새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애들이 굶주리고 그랬으니까.

지용길 사무국장-참 안타까운 일이었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니 고생 고생하다가 애들도 하두 못 먹고 시달리니까 그 자손들이 커서 배운 건 없어도 남보다 더 열심히 억척스럽게 일 했어. 그렇게 가난을 벗어나서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살게 되었어.

지용길 사무국장-어려움을 잘 극복했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런데 옛날에 그 많은 호수가 자꾸 나가는 바람에 비어가지고 들어올 사람은 없고 비어지면 집 파옥하고 파옥하고 그래서 남은 것이 이거야.

지용길 사무국장-도시화 되면서 변한 것이지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옛날 잘 살 때에는 고기 장사들이 청원에서 그 때는 차도 없고 그러니까 돼지 잡으면 고기를 이고 지고해서 여기 오면 부자 집에 가면 한 곳에서 다 털었다는 거야. 부자 집에서 여기 내리라고 해 가지고 광에 걸어놓고 그랬지.

지용길 사무국장-부자고 경기가 좋았다는 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대가로는 돈이 어디 있어. 곡식 부자니까 쌀이고 뭐고 퍼 주면 이놈의 것을 또 지고 가느라고 진을 쓰고 그런 세월을 지냈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잘 살던 시절 이야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아까도 얘기 했지만은 참 한탄스러운 게 부모들 덕분에 호강을 해가지고서는 그 좋은 호화스운 교육을 받았는데 훌륭하게 배운 것을 써 먹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색시 술집에 가서 다 털어먹고 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한심하고.

지용길 사무국장-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래가지고 결국 그 뭐여 본처는 너무 옛날에는 부자들은 나이가 어려서 장가보냈으니까. 없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장가가고. 왜냐하면 일 시켜 먹으로고 과년한 처자를 데려오는 거야.

지용길 사무국장-그 사람이 어렸을 때 이야기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본처를 괴산에서 데려왔는데. 한심하지 옛날에는 1년 있다가 친정에 근친 간다고 그랬는데. 그 때는 근친 보낸다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다 음식장만을 해서 고리고리 바리바리 실어서 친정 보내고 그랬는데.

지용길 사무국장-그런 관례가 있었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 분이 한 번은 여기를 딸네 집이라고 와 봤다는 거야. 오느라고 보니까 그 사돈 양반은 매일 증평 나가서 술집에 가서 술타령 하다가 해가 져야 오고 그랬는데. , 사돈이 일찌감치 와? 해가 지니까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지용길 사무국장-사돈이 온 줄도 몰랐나보네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부자 집이라고 해서 자기네는 잘 먹고 잘 지내니까 밥도 많이 먹지 않고 조금 먹었던 거야. 자기 하는 대로 친정아버지가 처음에 왔는데 사랑방에 계시라 해가지고 저녁때가 되었는데 아무 때나 아버지라고 못 갔다 드려 옛날에는.

지용길 사무국장-그런 것까지 따졌네요. 옛날에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시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오니까 그 때서야 저녁상을 차려가지고. 자기네 마냥 밥을 조그만 살짝 덮어서 푸니까 양이 안 찬단 말이야 온 사람들은 배불리 먹어야하는데.

지용길 사무국장-먼 길 걸어소 왔을 텐데 양도 부족하고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러니 저녁을 먹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참 기가 막힌 거야.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된 거야. 그 이튼 날 새벽에 딸이 밥 차려주는데 너 이리 잠깐 들어오라고 그러더래. 들어가니까 너무나 내가 너 시집을 잘 못 보냈구나. 고생스럽고 역겨워서 도저히 살수가 없거든 집으로 오라고 그러고 갔대.

지용길 사무국장-하하하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래선지 며느리가 친정을 간다고 하니까 그냥 못 보내거든. 동네사람이 다 와서. 떡도 여러 가지 떡을 만드는데. 아이 열두 살 먹은 신랑이 그걸 뭐 알겠어. 색시에게 떡 하는 데서 떡 달라고 하는 거야 신랑이. 색시는 동네 음식 하러 온 손님들이 있으니 민망하니까 말은 못하고 눈치를 줬다는 거여.

지용길 사무국장-신랑은 철이 없잖아요.

지교관 삽사리 종친님-그랬는데 그걸 뭐를 아는 사람 같으면 자기 색시 이야기 듣고 피해야 하는데. 아이 한다는 소리가 왜 눈을 흘기느냐고 말여. 밤에는 남 잠도 못 자게 그거만 조물락 조물락 하면서 왜 나한테 눈을 흘기느냐고 그러는 거야. 동네사람이 듣는데. 그러니 색시가 어떻게 되겠어. 홍당무가 되어가지고 친정에 가서 안 왔다는 거야. 옛날 사람들 보면 불상 했어 있어도.

지용길 사무국장-그렇네요. 득선할아버지의 세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집성촌인 삽사리를 잘 지켜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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