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총회장이었던 [이대영포럼] 열어 ‘선교사 이대영’ ‘목회자 이대영’에 대해 조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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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이었던 [이대영포럼] 열어 ‘선교사 이대영’ ‘목회자 이대영’에 대해 조명해

기사입력 2024.04.3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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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뿌리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제41회 총회장이었던 [이대영포럼]이 총회 내 원로라 할 수 있는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2024429() 오전11시 총회회관 2층 여전도회실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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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예배는 한영교회 김용제목사가 기도하고 사도행전 1119~21절을 봉독한 후 혜성교회 정명호목사가 봉독한 말씀을 중심으로 경계를 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호렙산교회 허활민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친 후 기독신보 발행인인 김만규목사의 사회로 포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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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시작하기 전, 이대영목사의 모교회로 알려진 금곡교회를 시무하는 오성희목사와 성광교육재단 김호식목사가 감사인사를 하고 이대영목사의 외증손자인 미군군목 폴김목사가 추모인사를 했다.

 

이대영목사가 담임으로 섬기고 총회장이 당선되기도 했던 승동교회를 담임하는 최영태목사도 참석해 감사 인사를 하기로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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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기독신문 주필이었던 김남식목사가 선교사 이대영에 대해 먼저 강의했다.

 

김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조직된 후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한 사실을 언급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세웠지만 질병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기 선교사들이 철수한 사실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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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성장하였고 한국적인 선교방법의 적실성이 입증되었다고 평가하면서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중단이 아닌 전진으로, 축소가 아닌 확장으로중국선교가 새롭게 출발한 사실을 드러냈다.

 

총회로부터 산동지역 선교사로 파송받은 이대영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부해리선교사(Rev. Henry Barren)의 전도로 홀로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으니 목회자로, 선교사로 평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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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은 첫 목회지인 안동읍교회를 시무하던 중 1922616일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로 파송 받았지만 1923년 심각한 재정압박에 시달려 총회에서 본국으로의 소환이 거론되기 시작 했다.

 

192398일 신의주 예배당에서 개회된 제12회 총회에서 전도부장 이자익목사는 산동선교 사업은 여전히 계속키 불능함으로 즉목선교사 2인을 소환하기로 결정하였사오며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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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익목사가 총회장이 된 함흥읍 신창리 예배당에서 1924912일 개회된 제12회 총회에서도 전도부장 차재명목사가 즉목선교사 이대영 홍승한목사 소환건을 청원하였고 가결되었다.

 

그렇지만 소환결정과 동시에 밝혀지지 않은 한 선교사가 300원을 연보 해 소환 두 달간 연기하기로 하고 계속 힘써도 안 되면 소환하기로 가결되었다. 경상도출신인 이대영선교사의 원류를 위해 제17회 경북노회는 이대영선교사 문제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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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인 염봉남 위철지 김영옥(경북노회장) 방해법 4인은 이대영목사의 원류를 위해 대동편시찰 구역에서 500여원, 외지전도회에서 130, 부인전도회에서 30. 600여 원을 마련해 총회 전도국과 교섭해 1년간 유임을 청원해 1925년 총회 때까지 연장되었다.

 

선교사역의 장래가 달린 제14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대영선교사가 총회에 참석해 6일만에 중국선교사로 계속 활동할 수 있다는 결정이 났다. 경북노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대영목사가 중국선교사로 계속 사역하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태도였다. 1937년 개최된 제26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기간 중 이대영목사와 주기철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한 바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동일한 신앙과 신학적 노선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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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19389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주기철목사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무장하고 반대의 길을 걸었지만 다수의 인사들은 시국 인식과 종교 보국이라는 빌미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종교정책에 협조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지만 중국 산동성 선교사였던 이대영목사와 방지일목사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총회에 축전을 보내는 등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제28회 총회 회의록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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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역을 분석해 보면 이대영선교사의 산동성 선교의 목적은 중국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산동선교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충실히 이행했다. 서구 선교는 학교를 시작해 인심을 얻은 후 교회를 설립했지만 한국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교인의 자녀를 양육할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교회는 선교비로 복음당을 개설하여 좌당전도를 위한 장소로 활용하고 성도가 증가하면 전도인을 고용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한국선교사들은 교인들이 예배당 건축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하도록 격려함으로 중국교회의 자립정신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 외에도 교역자 양성, 교직 수양회, 사경회와 부흥회를 하고 교회교육을 위해 도리반을 운영하고 주일학교 설립, 4개월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자 천자를 배우는 평민신자운동을 통해 문맹퇴치와 전도와 양육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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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방법이 다양해졌다. 개인전도와 순회전도를 위해 농촌지역에서 천막전도, 복음당전도, 호별 방문전도, 노방전도를 실시하고 1015년 성탄절에는 감옥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한국식 선교방법을 중국 선교현장에 적용했다. 중국교회는 십일조와 주일헌금 제도가 없었는데 한국선교사들은 전, 자급, 자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새로 조직되는 교회부터 주일헌금을 드리도록 가르쳐 주일헌금과 감사헌금, 십일조를 내는 신자가 생겼다.

 

주일을 범하는 자와 술을 마시는 자, 그리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교회의 장로 조사 전도인 등 17명을 단기 집중과정으로 가르치고 신입교육도 강화했다. 다른 한 편으로 교인과 직분자 중에 신앙이 부족한 자, 범죄한 자, 자기의 본부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은 권면, 책별, 면직, 출교하여 경계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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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훈련하기 위해 한국교회의 집사와 권찰 제도를 적용하면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가르치고 주일저녁예배,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를 실시하여 기도에 힘쓰게 했다. 또한 청년 면려회, 금주회, 독서회를 조직하여 신도들의 신앙과 삶을 향상시켰다.

 

경성 세브란스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 김윤식이 1918년 래양에서 병원을 개하는 등 의료선교와 교사 출신의 선교사 부인에 의한 일반교육과 구제 사역, 그리고 총회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여선교사에 의한 여성 사역 등 총체적인 선교사역이 이루어졌고 은사에 따른 팀 사역을 했다.

 

이대영선교사는 즉목을 중심으로 향촌교회들을 담당하여 순회하며 선교활동을 하였고 지방교회 중국전도인들을 재정적으로 보조하였다. 이대영선교사가 담당한 지방교회들은 즉묵성교회 선도당, 궁가장교회, 오산위교회, 대인관교회, 지방교회, 풍성교회, 곽리교회 등이다.

 

경북노회에 보낸 보고에 의하면 이대영선교사는 교회 및 복음당 4~5개 처를 설립하였고 새신자를 많이 얻게 되었다. 열심있는 전도활동은 기존 교회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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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가장교회는 전도인의 한 달 월급을 담당하게 되었고 지방교회는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380원 가량 연보하기도 했다. 새벽기도회에 죄를 회개하는 눈물과 금식기도로 집사와 장로 간 불화를 화해하여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이대영목사와 중국 전도인, 그리고 동료 선교사들은 1927년에 방해와 해산을 당하면서도 열심히 순회하며 전도한 결과 산동에서 중국인 53,180명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1918년 제7회 총회는 전도부 규칙을 제정 발표했다. 이로써 보다 체계적인 선교 행정을 펼 수 있었다. 선교 현장은 교단이 제정한 규칙을 따라 선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했다.

 

선교사 선발 위원회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교사로 선정했고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선교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에 속한 조사 또는 목회 경험이 있는 자로서 신학을 마친 30세 이상 40세 초반까지의 기혼자로 상당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들 중 선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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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선교지에 세 가정 이상 함께 사역하도록 배치하였고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들과 독신 여성 선교사도 함께 사역하도록 했다. 이러한 배치는 서로에게 전인적인 필요를 공급하고 팀사역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윈윈전략이었다.

 

재정에 있어서도 일원화와 선교비의 사용 한계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선교비는 전국교회에서 보낸 감사절 헌금과 특별헌금, 그리고 총회가 책정하는 전도국 예산이 결정 되는대로 선교회 회계에게 직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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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타인에게 특별헌금을 청구하거나 개인으로부터 헌금을 받게 될 때는 전도국의 인허를 받은 후 사용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생활비는 균등하게 지급했고 사역비에 관한 수입과 지출에 관한 모든 경비를 선교회가 본국 총회에 보고하여 감사를 받았다.

 

언어연수와 안식년제도, 자녀 교육 문제에 대한 규정도 있다. 선교비는 총회 전도국이 일괄적으로 관리기에 선교비 모금과 후원자 관리의 부담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교비 모금이 전적으로 선교사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재 상황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보인다.

 

산동 청도에서 활동하던 이대영 선교사는 19487월 분단된 조국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약 10개월간 교회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총회에 참석하여 산동에서의 선교활동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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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5,6월경 중국으로 입국하려했으나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되면서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 가족과 생이별했다. 다행히 사모와 자녀들이 귀국하여 1955424일 오후2시 영락교회에서 이대영선교사 선교 33주년 기념 및 가족 환영예배를 드렸다.

 

이대영선교사는 교적을 중국에 두고 한국에서 활동해야 했다. 1955년 총회에서 중국선교사 이대영목사의 사면이 수리되어 1922년부터 시작한 중국 선교사직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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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목사는 서울 승동교회의 청빙으로 담임에 부임한 후 1955614일 위임식을 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 이후로 수년간 분열의 회오리속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고 196811281세의 고령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두 번째 강의는 박노진박사가 목회자 이대영에 대해 강의했다. 이대영목사가 태어난 예천지역은 불교 뿐 아니라 유교가 우세한 지역이었다. 이런 마을의 분위기로 이대영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유학에 정통했다. 후에 중국선교사로 선택된 이유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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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목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금당실마을에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소위 교동대감으로 불리는 이유직이라는 사람이 1893년 낙향해 살던 중 1899년부터 몰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금곡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던 중 1907년 미 북장로교 소속 부해리선교사가 이희봉조사와 함께 예천지역에 왔다. 이 때쯤 나만기라는 청년이 기독교에 입교해 예천군 괴당교회에 출석했고 금당골에도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대영도 친구였던 나만기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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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상태였던 20대의 이대영은 안동교회 담임이었던 김영목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에 입문한 후 이대영은 아버지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경북 흥해로 이사해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선교사의 지도를 받고 겨울남자성경반에서 공부하고 5년제 평양장로회신학교 2학년에 입학해 졸업했다.

 

이대영은 조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목사 안수 후에는 노회에서도 중요한 역할들을 맡았다. 안동교회 위임목사로 활동하던 중 총회 전도부가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하자 12개월간 사역했던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중국 선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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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목사는 안대선 선교사의 주선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진 기독청년면려회를 창립해 192125일 안동교회 제58회 당회에서 공식적으로 허락해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출범하게 했다. 이것이 전국기독청장년면려회(CE)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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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박사는 목회자로서 이러한 이대영목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첫째, 이대영목사는 복음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영에 붙잡힌 목회자였다.

둘째, 이대영목사는 성경을 능력으로 증거하는 설교자 목회자였다.

셋째, 이대영목사는 성경을 종합하여 실천하는 목회자였다.

넷째, 이대영목사는 밤 새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의 목회자였다.

다섯째 이대영목사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전도자 목회자였다.

다섯째 이대영목사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가슴 뜨거운 부흥사 목회자였다.

일곱째 이대영목사는 성경 진리를 가르쳐 전하는 교육자 목회자였다.

여덟째, 이대영목사는 교회 행정에 밝아 덕스럽게 치리하는 행정가 목회자였다.

아홉째 , 이대영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교적 목회자였다.

열째 , 이대영목사는 결단력이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목회자였다.

마지막으로 이대영목사는 동역자를 귀히 여겼던 사랑의 목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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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박사는 삶을 추적해본 결과 이대영목사는 예수를 믿기 시작한 날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62년 동안 우리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목회자로 살았다.”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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